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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g Deok-soo (10 December 1894 – 2 December 1947) was a Korean politician, independence activist, journalist, and political scientist. He was the first editor-in-chief of the Dong-A Ilbo. He was the founder and second head of the Korea Democratic Party from 1945 to 1947. (en)
- (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장덕수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하였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글들을 수없이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민족을 배반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1948년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에 수록되었다. (ko)
- 張德秀(韓語:장덕수,1894年12月10日-1947年12月2日),韓國的独立运动家、政治家、教育家、学者、媒体人士。本贯結城,雅号雪山(설산)。 (z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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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g Deok-soo (10 December 1894 – 2 December 1947) was a Korean politician, independence activist, journalist, and political scientist. He was the first editor-in-chief of the Dong-A Ilbo. He was the founder and second head of the Korea Democratic Party from 1945 to 1947. (en)
- 張德秀(韓語:장덕수,1894年12月10日-1947年12月2日),韓國的独立运动家、政治家、教育家、学者、媒体人士。本贯結城,雅号雪山(설산)。 (zh)
- (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장덕수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하였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