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사료 DB (original) (raw)

중사로 지내는 5악

중사(中祀).註 059

註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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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산천에 대한 국가적 제사로서 중간 등급의 제사. 中祀의 대상으로서 五岳, 四鎭, 四海, 四瀆과 俗離岳·推心 등 6處가 있다. 주(周)대에는 次祀로서 日月星辰과 社稷, 五祀, 五嶽에 제사지냈다가(《주례(周禮)》 春官篇 肆師條), 당(唐)대에는 中祀로서 日月星辰, 社稷, 先代帝王 및 五岳, 四鎭, 四海, 四瀆과 帝社, 先蠶, 釋奠 등에 제사지냈으니(《구당서(舊唐書)》 권21 禮儀志), 신라는 당(唐)의 中祀制度를 받아들이되 산천에 대한 제사만으로 변용한 듯하다. 한편 中祀의 五岳, 四鎭, 四海, 四瀆은 신라의 東西南北 四邊을 원칙으로 하고 때로는 거기에 中이 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中祀의 마지막에 표제없이 들어있는 俗離岳 등의 6개의 山·城·鎭은 小祀에 들어갈 것이 잘못 끼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견해가 있으나(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5쪽),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에서도 이들을 신라 때의 中祀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간단하지 않다. 아마 이들은 신라 中祀의 五岳, 四鎭, 四海, 四瀆 체계가 완성된 후에,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추가로 中祀에 지정된 것이 아닐까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쪽).

5악註 060

註 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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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中祀의 대상으로 중시되었던 다섯 山, 즉 東岳=吐含山, 南岳=地理山, 西岳=龍山, 北岳=太伯山, 中岳=父岳(公山). 《삼국유사》 권5 感通篇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진평왕(眞平王)대의 일로서 五岳神君의 이름이 나오나, 《삼국사기》 祭祀志의 五岳과의 관계를 추측하기 어렵다. 五嶽은 원래 중국에서 나라의 鎭으로서 숭상하던 다섯 방위의 名山으로서, 천자가 그를 제사지내고 이 곳에 순행하였으며 당(唐)에서도 中祀로서 제사되었는데, 신라에서 통일 직후에 이 제도를 수용함으로써 제사지에 나오는 신라의 五岳이 성립되었다고 보인다. 삼국 시기에도 신라의 본거지인 경주 평야 주변에 吐含山, 南山, 仙桃山, 金剛嶺, 中岳(?)의 오악이라는 관념이 성립되어 있었던 듯하나,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됨에 미쳐 문무왕(文武王) 말년이나 신문왕(神文王)대에 그 확장된 국토의 대표적 산악을 오악으로 다시 지정하여 이를 국가적 제사의 中祀에 편입시킨 것이며, 이 五岳에는 각기 山神이 있었고, 그 산신들을 彫像하여 모시는 祠堂이 있었다. 또한 중앙의 수도 부근에 있어야 할 中岳이 대구지방에 있는데다가, 사방의 토함산, 태백산, 계룡산, 지리산이 각각 왜·고구려·백제·가야 방면의 정치적 세력을 진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國防上의 要地이기도 하였으므로, 오악은 신라 전제왕권의 상징적 존재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18쪽).

은 동쪽의 토함산(吐含山)대성군(大城郡)註 061

註 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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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五岳 중의 東岳으로서 현재의 慶州市 중심부와 陽北面에 걸쳐 있는 吐含山. 세주의 大城郡은 권34 지리지 良州 소속의 郡이며 明活山城 일대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으로서 현재의 慶州市 동쪽 지역. 토함산은 昔氏部族의 상징적 산악으로서 神聖視되고, 신라의 동쪽 경계에 위치하여 倭兵의 침략을 막는 것과 연결되는 國境의 산악으로서 중시되었다는 설이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198쪽). 《삼국유사》 권1 紀異篇 脫解王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文武王)대 調露 2년(680)에 脫解의 뼈를 疏川丘에서 파내어 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으며 이에 대해 고려 말기 당시까지 國祀를 이어 이를 ‘東岳神’이라 하였다 하고, 同書 王曆篇 脫解尼叱今에는 이를 ‘東岳大王’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말년에 昔脫解를 東岳인 吐含山의 主神으로 삼아 국가적으로 제사지낸 것이라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쪽).

, 남쪽의 지리산(地理山)청주(菁州)註 062

註 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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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五岳 중의 南岳으로서 현재의 慶南 山淸郡, 河東郡과 全北 南原市 및 全南 求禮郡에 걸쳐 있는 지리산. 智異山이라고도 한다. 細注의 菁州는 권34 지리지 康州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진주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山川에는 府東 45里에 있는 含月山을 신라가 南嶽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나, 이는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제사지에서 지리산을 菁州(현 진주) 소속으로 한 것은, 신라에서 지리산을 전라도 방면의 百濟편보다는 慶南 방면의 加耶와 연결시켜 생각한 결과라는 설이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203쪽). 한편 智異山聖母를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 王建의 母인 龍女라고 한 것이나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釋迦의 母인 摩耶夫人이라고 한 것은 모두 牽强附會이고, 실은 山神을 말하는 것이다(김영수, 「지리산 성모사에 취하여」, 《진단학보》 11, 1939, 141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9 南原都護府 祠廟에 의하면, 조선시대 당시에 智異山神祠가 南原府의 남쪽 64리 되는 小兒里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求禮郡 龍方面 북쪽 일대이나, 그것이 신라 당시의 위치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22쪽).

, 서쪽의 계룡산(雞龍山)웅천주(熊川州)註 063, 북쪽의 태백산(太伯山)나이군(奈已郡)註 064

註 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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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의 부악(父岳)공산(公山)이라고도 하는데, 압독군(押督郡)이다.註 065

註 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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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五岳 중의 中岳으로서 公山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북 군위군 부계면, 신녕면 및 경산시 와촌면에 걸쳐 있는 팔공산. 압독군은 권34 지리지 良州 獐山郡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경산시. 권41 열전 金庾信傳 上에 나오는 진평왕(眞平王) 33년(611)의 ‘中岳石窟’은 기록 연대상의 잘못이 없다면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며, 당시의 中岳을 慶州市 斷石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김상기,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 《이홍식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69, 8~11쪽) 확실치 않다. 父岳은 押督國 같은 소국을 대표하는 산이며, 신라가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達句伐로 遷都하려던 계획과 관련하여 중시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8~200쪽)가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쪽).

이다.

註) 059

신라의 산천에 대한 국가적 제사로서 중간 등급의 제사. 中祀의 대상으로서 五岳, 四鎭, 四海, 四瀆과 俗離岳·推心 등 6處가 있다. 주(周)대에는 次祀로서 日月星辰과 社稷, 五祀, 五嶽에 제사지냈다가(《주례(周禮)》 春官篇 肆師條), 당(唐)대에는 中祀로서 日月星辰, 社稷, 先代帝王 및 五岳, 四鎭, 四海, 四瀆과 帝社, 先蠶, 釋奠 등에 제사지냈으니(《구당서(舊唐書)》 권21 禮儀志), 신라는 당(唐)의 中祀制度를 받아들이되 산천에 대한 제사만으로 변용한 듯하다. 한편 中祀의 五岳, 四鎭, 四海, 四瀆은 신라의 東西南北 四邊을 원칙으로 하고 때로는 거기에 中이 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中祀의 마지막에 표제없이 들어있는 俗離岳 등의 6개의 山·城·鎭은 小祀에 들어갈 것이 잘못 끼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견해가 있으나(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5쪽),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에서도 이들을 신라 때의 中祀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간단하지 않다. 아마 이들은 신라 中祀의 五岳, 四鎭, 四海, 四瀆 체계가 완성된 후에,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추가로 中祀에 지정된 것이 아닐까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쪽).바로가기

註) 060

신라에서 中祀의 대상으로 중시되었던 다섯 山, 즉 東岳=吐含山, 南岳=地理山, 西岳=龍山, 北岳=太伯山, 中岳=父岳(公山). 《삼국유사》 권5 感通篇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진평왕(眞平王)대의 일로서 五岳神君의 이름이 나오나, 《삼국사기》 祭祀志의 五岳과의 관계를 추측하기 어렵다. 五嶽은 원래 중국에서 나라의 鎭으로서 숭상하던 다섯 방위의 名山으로서, 천자가 그를 제사지내고 이 곳에 순행하였으며 당(唐)에서도 中祀로서 제사되었는데, 신라에서 통일 직후에 이 제도를 수용함으로써 제사지에 나오는 신라의 五岳이 성립되었다고 보인다. 삼국 시기에도 신라의 본거지인 경주 평야 주변에 吐含山, 南山, 仙桃山, 金剛嶺, 中岳(?)의 오악이라는 관념이 성립되어 있었던 듯하나,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됨에 미쳐 문무왕(文武王) 말년이나 신문왕(神文王)대에 그 확장된 국토의 대표적 산악을 오악으로 다시 지정하여 이를 국가적 제사의 中祀에 편입시킨 것이며, 이 五岳에는 각기 山神이 있었고, 그 산신들을 彫像하여 모시는 祠堂이 있었다. 또한 중앙의 수도 부근에 있어야 할 中岳이 대구지방에 있는데다가, 사방의 토함산, 태백산, 계룡산, 지리산이 각각 왜·고구려·백제·가야 방면의 정치적 세력을 진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國防上의 要地이기도 하였으므로, 오악은 신라 전제왕권의 상징적 존재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18쪽).바로가기

註) 061

신라 五岳 중의 東岳으로서 현재의 慶州市 중심부와 陽北面에 걸쳐 있는 吐含山. 세주의 大城郡은 권34 지리지 良州 소속의 郡이며 明活山城 일대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으로서 현재의 慶州市 동쪽 지역. 토함산은 昔氏部族의 상징적 산악으로서 神聖視되고, 신라의 동쪽 경계에 위치하여 倭兵의 침략을 막는 것과 연결되는 國境의 산악으로서 중시되었다는 설이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198쪽). 《삼국유사》 권1 紀異篇 脫解王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文武王)대 調露 2년(680)에 脫解의 뼈를 疏川丘에서 파내어 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으며 이에 대해 고려 말기 당시까지 國祀를 이어 이를 ‘東岳神’이라 하였다 하고, 同書 王曆篇 脫解尼叱今에는 이를 ‘東岳大王’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말년에 昔脫解를 東岳인 吐含山의 主神으로 삼아 국가적으로 제사지낸 것이라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쪽).바로가기

註) 062

신라 五岳 중의 南岳으로서 현재의 慶南 山淸郡, 河東郡과 全北 南原市 및 全南 求禮郡에 걸쳐 있는 지리산. 智異山이라고도 한다. 細注의 菁州는 권34 지리지 康州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진주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山川에는 府東 45里에 있는 含月山을 신라가 南嶽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나, 이는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제사지에서 지리산을 菁州(현 진주) 소속으로 한 것은, 신라에서 지리산을 전라도 방면의 百濟편보다는 慶南 방면의 加耶와 연결시켜 생각한 결과라는 설이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203쪽). 한편 智異山聖母를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 王建의 母인 龍女라고 한 것이나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釋迦의 母인 摩耶夫人이라고 한 것은 모두 牽强附會이고, 실은 山神을 말하는 것이다(김영수, 「지리산 성모사에 취하여」, 《진단학보》 11, 1939, 141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9 南原都護府 祠廟에 의하면, 조선시대 당시에 智異山神祠가 南原府의 남쪽 64리 되는 小兒里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求禮郡 龍方面 북쪽 일대이나, 그것이 신라 당시의 위치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22쪽).바로가기

註) 065

신라 五岳 중의 中岳으로서 公山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북 군위군 부계면, 신녕면 및 경산시 와촌면에 걸쳐 있는 팔공산. 압독군은 권34 지리지 良州 獐山郡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경산시. 권41 열전 金庾信傳 上에 나오는 진평왕(眞平王) 33년(611)의 ‘中岳石窟’은 기록 연대상의 잘못이 없다면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며, 당시의 中岳을 慶州市 斷石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김상기,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 《이홍식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69, 8~11쪽) 확실치 않다. 父岳은 押督國 같은 소국을 대표하는 산이며, 신라가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達句伐로 遷都하려던 계획과 관련하여 중시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8~200쪽)가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쪽).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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