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가 되지 못했던 ‘여성의 몸’을 연결하는 ‘고백들’ [플랫] (original) (raw)
몸과 고백들 |
이서수 지음 |현대문학 |308쪽 |1만6800원
이미지컷 unsplash
‘금기’이거나 ‘객체’이거나 둘 중 하나였던 여성의 ‘몸’
일곱 살의 ‘나’는 옆집 사는 친구 ‘기정’과 비밀스럽게 자위행위의 경험을 나눈다. ‘나’와 기정은 서로 자세는 다르지만, 서로가 “무얼 했고 무얼 얻었는지 정확히 이해한다.” 아홉 살이 된 ‘나’는 학원의 여자아이들을 강제로 껴안으며 성추행하던 ‘청과 흑’에 이를 똑같이 갚아주며 그들에게 불쾌감을 선사한다. “‘청과 흑’은 늘 ‘했어!’라고 외치고, 여자애들은 항상 ‘당했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보며 제 마음속엔 불만과 의구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반대는 불가능한 것인가.”
중학생이 된 ‘나’는 ‘앞’과 ‘옆’과 ‘뒤’에 앉은 ‘날라리 패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있지도 않은 남자 친구와의 연애사를 능수능란하게 지어낸다. 어른들과 또래 남자들에게 “발랑 까져가지고”라는 힐난을 수시로 듣고 자랐던 ‘나’는 끊임없이 섹스를 궁금해하고 탐닉하며 낯선 남자와 “감정이 배제된 기능적인 섹스”를 즐기는 성인으로 성장한다. ‘나’는 말한다. “여자는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섹스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인 것은 저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쉽게 지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서로가 각자 자신의 쾌감에만 오롯이 집중해 상대를 지워버리고 이 넓은 우주에 자신의 감각 세포만 남게 하는 것. 그게 저에겐 최상의 섹스입니다.”
이서수 작가의 <몸과 고백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다채로운 고백들을 담은 연작소설집이다. 수록작 ‘몸과 금기들’에서 거침없이 ‘여성의 쾌락’이라는 금기를 깨나가는 화자가 등장한다. ‘나’는 타인의 감각까지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라는 욕망으로 뻗어 나가며 “십자가 대신 텔레딜도닉을 짊어지고 저는 어디까지 가 볼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다. 여성에게 강요됐던 금기와 윤리와의 결합을 끊어내며, 이를 쾌락과 윤리와의 연결로 전복시키는 일종의 선언처럼 읽히는 대목이다.
작가는 ‘몸과 금기들’을 비롯해 ‘몸과 여자들’ ‘몸과 우리들’ ‘몸과 무경계 지대’ ‘몸과 비밀들’ 등 5편의 작품에서 논바이너리(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을 벗어난 젠더 정체성),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정체성을 구분 짓지 않고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사랑), 무성애 등을 다루지만, 단순한 분류법에 따라 구분 짓기를 경계한다. 작품 속 화자들은 각기 다른 정체성을 보이지만, 다층적인 이들의 목소리는 결국 자신의 몸에 관한 다양한 탐구를 통해 경계를 허물고 비로소 ‘내’가 된다는 점에서 연대의 기록이기도 하다.
쾌락을 탐닉하는 주인공도, 섹스를 거부하는 화자도
‘몸과 금기들’이 여성의 쾌락이라는 금기의 타파를 다뤘다면, ‘몸과 여자들’에서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듯한 작품이다. ‘몸과 여자들’의 화자는 쾌락을 탐닉하는 ‘몸과 금기들’의 화자와는 정반대로 “섹스에 내 몸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성의 성욕과 쾌락을 긍정하는 것처럼 성적 욕구를 경험하지 않는 것 역시 인정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몸과 여자들’의 ‘나’는 부부라면 일주일에 두 번은 관계를 해야 한다는 남편과 아이 갖기를 요구하는 시가에 동의할 수 없어 이혼을 결심한다. “저는 섹스에 제 몸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이를 낳는 일에도 제 몸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갖는 일은 온전히 저의 선택과 열망으로 결정되어야 할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화자는 이혼 후 친해진 영석 언니가 술에 취한 새벽, 자신을 말도 없이 성인용품점에 데려가자 그것이 다분히 폭력적이라고 느끼며 자신의 속마음을 노트에 적는다. “영석 언니, 사람들은 섹스를 마음껏 즐기는 게 건강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나처럼 섹스가 싫은 사람도 존재해…억압과 해방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몰라. 억압이 계속되다가 어느날 전복되어 해방으로 향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해방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국 억압으로 작용해. 나에겐 섹스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래.”
몸과 고백들
작가는 작품들에서 여성의 몸을 규정해 온 각 시대적·사회적 조건 등을 자세히 살피면서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적 통념과 억압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연인 사이엔 강간이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던 시절에 애인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고, 회식 자리에서 선정적인 영화 얘기를 꺼내며 은근한 성희롱을 일삼는 상사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은 적도 있습니다.”(‘몸과 여자들’) “섹스를 좋아한다고 원한다고 말하면 성범죄를 당했을 때 보호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당해도 싼 여자. 그렇게 손가락질 당하고 맙니다.”(‘몸과 금기들’) “여자의 몸은 전쟁터야, 너는 아군이 없어. 그런 말들은 여자의 몸을 더욱 전쟁터로 만들고, 저에게 아군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몸과 우리들’)
책의 제목처럼 모든 작품은 ‘고백’의 형식을 띤다. 이때의 ‘고백’은 ‘회개’의 전 단계가 아니라, ‘연결’의 전제라는 점에서 새롭다. “고백 후 죄를 면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연결을 꿈꾸기 위해서고, 돌아보니 남은 것이 없는 수다가 아니라 살아 있기에 줄줄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서의 수다이지요.” (‘몸과 비밀들’) 각 작품의 ‘나’들의 고백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고백들이지만, 이는 질문하고 방황하면서도 ‘나 자신’으로 가려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결돼 있다. 작가는 말한다. “누군가에게 고백은 가장 큰 연대의 방식일 수 있음을 알기에, 고백을 마친 그들 모두가 부디 평안해지기를 기원한다.”
▼박송이 기자 psy@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