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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더니스트의 회화적 조크-이인범(미학예술학, 상명대교수)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필자에게 화가 유인수는 거침없이 자신의 작업이 지닌 우리 화단 내 위치를 모더니스트로 자리 매긴다.

이러한 자기 확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러한 언급들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는 정작 그가 추구해 왔던 작품세계를 훑어보면 오히려 더 선명하지 않게
다가선다.

화면을 간략한 선에 의해 만화같이 여러 칸 구획 짓고, 그 나뉘어진 틀들 안에서 따뜻한 수사법과 구상적 형태들을 통해 전개시키는 그의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보면, 왜 애써 스스로를 모도니스트로 규정 지으려는지 조금은 의아스럽기조차 하다.

최근 그의 작업 세계가 내러티브를 극도로 절제하다고 미술이라는 형식 자체의 자기비판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던 모더니즘 회화의 전형들과는 상상한 거리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구현해내고 있는 에피소트같은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모더니즘 미술이 지금까지 간과해 온 삶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어 전면에 배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그 맞은편의 세계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래서 작가의 이러한 자기규정을 통해서 우리는 다만 필시 그 자신이 그 동안 걸어온 길과 그리고 그가 앞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 사이에 어떠한 틈이 벌어져 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더니즘 회화가 보여 왔던 윤리의식과 냉엄한 엄숙주의에 대한 동경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 두 세계 사이의 틈새야말로 평생 동안 그가 자신의 예술적 관심사를 일깨우는 모종의 강력한 동인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13회째라고 하는 적지 않은 개인전과 여러 기획전들에 출품하며 한 평생 전개해 온 유인수의 작품세계의 성격은 그만한 분량의 폭넓은 변주가 있어 왔다.

예컨대, 올오버 페인팅의 성격을 보여주는 <도시 이미지> 연작에서부터 때로는 암호나 혹은 해독불가능한 문자 같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니르바나> 시리즈,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 하면서도 기호화된 구상적인 형상들로 무엇인가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지난 십 수 년간 지속된 <일상적 이미지> 연작들은 그러한 변화의 폭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그러한 변주의 폭만큼이나 그의 작업들 안에서 일어나는 이질성들이 공존하며 동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질성은 한 작가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것인데,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확연하게 읽혀지는 것은 한편에서는 인간이란 삶의 현존이 지닌 한계 상황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자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고, 그와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예술의욕과 무관하게 화면과 그 구성요소로서의 선과 색채를 향한 순수한 열망이 동시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서로 배척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야기시키는 아노미 현상은 삶은 삶대로 예술 형식은 형식대로 긴장감 있게 자신을 가능케 하는 존립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그 두 이질적인 세계는 유인수의 작품세계를 이끄는 쌍두마차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초기의 <도시 이미지> 연작에서 확인되는 형식적 순수성의 성취는 다름 아니라 삶의 현존에 대한 긴장감 있는 부정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도달한 장소이자 미학적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후기의 <일상적 이미지> 연작들은 삶에 대한 서사를 과제로 삼으면서 모더니즘적 형식주의의 와해를 불사함으로써 일궈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듯이 그의 작품세계는 뜨거운 삶에의 지향성과 차가운 모더니즘의 형식 논리 혹은 윤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상호 지양을 통해 상승해 왔다는 것이 필자가 본 작가 유인수의 세계이다.

그의 작업을 조망하는 재미가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아노미 현상을 훔쳐보는 것이고 그 갈등과 번민이 어떤 모습으로 현상되는지를 살피는데로 쏠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발생론적으로 추적해 보면 그러한 성격이 그의 성장배경과 문관하지 않다. 그는 6.25 한국전쟁의 참화와 그로 인해 이어지니 폐허와 궁핌의 시절에 성장기를 거쳤고, 4.19, 5.16 등으로 이어지는 각종 정변들을 배경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전후 실존주의적 징후들을 몸으로 살아낸 세대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를 모더니즘 회화의 맥락안에 위치시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가적 형성은 앵포르멜운동 이래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의 성립기와 겹쳐지고 있다.

그러니 한 인간 존재로서 삶의 현실을 향한 내용적 관심과 서구 모더니즘의 모본 텍스트에 따라 예술은 예술로서 구현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작가로서의 입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이 만만치 않으리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그동안의 작품편력은 그가 끌어안아야 했던 근본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니라 그러한 이율배반의 해소였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서 작가적 가능성도 어려움도 발생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컨대, 이른 시기에 시도된 <도시 이미지>, <니르바나> 연작들은 모더니스트로서의 윤리의식이 구현되고 있으나 작가 본인의 실존적 사태와 격리되는 그 무엇으로, 19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일상적 이미지> 연작들은 자신의 삶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구현해내고 있으나 ‘모더니스트’로서의 미학적 성취하는 그의 작가적 이상과 유리되고 있다는 아쉬움으로 다가서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인전이 지닌 의미는 주목할 만하다.

화단의 중진 작가로서 혹은 인생을 살만큼 산 한 원숙한 경험의 소유자로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 달관의 경지이다.

무엇보다도 선으로 구획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작은 방들은 이제 그에게 단지 존재를 조건지우고 한계지우는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현실을 관용하고 너그럽게 감싸는 유희의 터전이다. 그래서 어느덧 그 안에 갇혀 포박된 듯이 그려지는 인간들은 실존적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그 한계상황들마저 따듯함과 유머로 즐기는 향유자로서 다가선다.

그래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먼 거리에서 단지 차가운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존재의 덫에 걸린듯 한, 그래서 단지 뜨거운 세상을 기호적 사태들로 도해하며 국외자로 밀폐되어 있던 이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다.

거기서는 이미 화면의 형식적 결에 대한 모더니스트적 집착이나 경직된 윤리의식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의 무겁고 어두웠던 화면은 밝아지고, 국회의사당을 에워싸고 있는 정객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자들, 그 밖의 허명을 향해 질주하는 이 시대의 온갖 인간군상들마저 그가 그려내는 도상들은 이제 지긋지긋한 존재의 덫이 아니라 단지 삶의 다양한 양태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형상들에는 한층 더 구체성과 명로성이 더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 모두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입, 사랑과 관조에서 흘러나오는 유머와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은 화가로서의 연륜의 두께가 그에게 선물한 자연주의의 선물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그래도 그가 모더니스트이길 고집한다면, 한 마디 덧덧붙여 조크를 즐길 둘 아는 모더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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